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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 경제학에서 사회적 총자본과 이윤

islands 2023. 8. 2. 10:36

마르크스 경제학에서 사회적 총자본 개념

개별 자본의 총합으로서 ‘사회적 총자본이란 다음을 의미한다.

개별 자본의 순환들은 서로 엉키며 서로 전제가 되고 조건으로 되는 것이며, 그리하여 바로 이렇게 엉킴으로써 사회적 총자본(dasgesellschaftliche Gesamtkapital)의 운동을 이룬다. 단순 상품 유통에서 한 상품의 변태 전체가 상품 세계 전체의 일련의 변태들의 한 고리로서 나타났듯이, 이제는 개별 자본의 변태가 사회적 자본의 일련의 변태들의 한 고리로서 나타난다.(2권 353-4/414)

사회적 총자본(社會的總資本, das gesellschaftliche Gesamtkapital)이란 개별적으로 순환하고 있는 개별 자본들의 총합을 가리킨다. 개별 자본들은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운동하며 그리하여 상호 연관된 총자본의 형태로 나타나게 된다. 따라서 개별 자본은 독자적으로 운동하기보다는 총자본의 한 부분으로서 운동한다고 보아야 한다.
사회적 총자본의 운동은 사회적 차원에서 자본의 재생산 과정이자 동시에 자본가 계급과 노동자 계급이라는 자본주의적 생산관계의 재생산 과정이다.

 

마르크스 경제학에서 사회적 생산의 두 부문

사회적 총자본의 운동과 관련하여 사회적 생산 부문은 크게 두 부문, 즉 ‘I 부문’과 ‘II 부문’으로 나누어진다.

사회적 총 생산물, 따라서 또 사회의 총생산은 두 개의 큰 부문으로 분할될 수 있다. I. 생산 수단(Produktionsmittel), 즉 생산적 소비로 들어가지 않으면 안 되는, 또는 적어도 들어갈 수 있는 형태를 띠는 상품들. II. 소비 수단(Konsumtionsmittel), 즉 자본가 계급과 노동 계급의 개인적 소비로 들어가는 형태를 띠는 상품들. 이 각 부문에 속하는 여러 생산 분야의 총체가 단일한 하나의 큰 생산 부문을 이룬다. 즉 하나는 생산 수단 생산 부문을 이루며, 다른 하나는 소비 수단 생산 부문을 이룬다.(2권 394/466)

사회적 생산은 크게 두 부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I 부문’은 ‘생산 수단의 생산 부문으로서 생산에 필요한 노동 수단이나 노동대상을 생산한다. II 부문은 소비 수단의 생산 부문으로서 자본가나 노동자에게 필요한 소비 수단을 생산한다. 그런데 I 부문에서 생산된 생산 수단 일부는 IⅡ 부문에서 생산된 소비 수단의 일부와 교환됨으로써 I 부문과 II 부문은 교환 관계를 맺게 된다.그리고 II 부문 내부에서도 생필품과 사치품의 생산 부문 사이에 교환이 이루어진다. 이렇게 각각의 사회적 생산 부문은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사회적 총자본의 일부로서 기능한다.

마르크스 경제학에서 이윤(독 : Profit / 영 :profit)

 

마르크스 경제학에서 이윤 개념

마르크스는 자본가들이 많은 관심을 기울이는 ‘이윤’ 개념을, 잉여가치 개념을 바탕으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잉여가치가 총 투하 자본의 산물이라고 생각될 때 잉여가치(Mehrwert)는 이윤(Profit)이라는 형태를 취하게 된다. 그러므로 일정한 가치액이 자본인 것은 그것이 이윤을 얻기 위하여 투하되기 때문이며, 또는 이윤이 나오는 것은 일정한 가치액이 자본으로 사용되기 때문이라는 것이 된다. 이윤을 p로 표시하면, 공식 C = C+v+s = k+s는 공식 C = k+p, 즉 상품 가치 = 비용 가격+이윤으로 전환된다.(3권 46/39-40)

잉여가치를 노동력(v)의 산물로서만 보는 것이 아니라, 생산 수단(c)과 노동력(v)의 구매에 들어간 총 투하 자본(k)의 산물로 보게 되면, 잉여가치는 이윤이 된다. 이 경우에 한 상품의 가치(C)는 비용 가격(k)과 이윤(p)을 합한 것이다. 따라서 이윤(利潤, Profit)이란 생산 과정에 투입된 총자본으로부터 산출된 잉여가치를 가리킨다.

자본가에게 있어서는 잉여가치의 원천이 어디인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총자본에 대해 얼마만큼의 잉여가치 즉 이윤이 창출되었는가가 중요하다. 그래서 자본가들은 잉여가치보다는 이윤에 더 많은 관심을 표명한다.

 

마르크스 경제학에서 이윤 형태의 신비성

마르크스는 ‘이윤의 형성 과정이 보여주고 있는 신비성을 잉여가치를 토대로 규명해 낸다.

우리가 여기에서 처음 대면하는 이윤은 잉여가치와 동일한 것인데,이윤은 자본주의적 생산 양식으로부터 필연적으로 발생한 신비화한 형태일 따름이다.

비용 가격의 외관상 형성에서는 불변 자본과 가변 자본 사이의 차이가 인정될 수 없기 때문에, 생산 과정 중에 발생하는 가치 변화의 원천은 가변 자본 부문으로부터 총자본으로 옮겨지지 않을 수 없다. 한쪽 끝에서 노동력의 가격이 임금이라는 형태를 취하기 때문에, 반대쪽 끝에서는 잉여가치가 이윤이라는 형태로 나타나게 된다.(3권 46/40)

자본주의적 생산 양식에서 자본가는 총투하자본으로부터 얼마만큼의 잉여가치가 창출되었는지에 관심을 두기 때문에, 그러한 잉여가치가 노동력에서 산출되었는지 그렇지 않은지에 대해서는 관심을 두지 않는다. 여기서는 가변 자본과 불변 자본의 차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총 투하 자본이 중요하다. 그래서 잉여가치는 가변 자본이 아니라 총 투하 자본에서 산출된 것으로 간주하며, 그 결과 잉여가치는 이윤이라는 변형된 형태를 취함으로써 신비성을 띠게 된다.이윤 형태는 자신의 원천을 신비하게 은폐하고 있는 것이다.